화장실만 허용 24시간 ‘무한필버’… 의장·부의장은 맞교대 ‘극한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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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혁 기자
수정 2025-09-30 01:32
입력 2025-09-30 01:00

뉴노멀이 된 필리버스터 막전막후

주호영 부의장 사회 불참 선언 주목
박수민, 17시간 12분 최장 기록 깨
생리 현상 해결 위해 기저귀 차고
화장실 핑계로 휴식·간식 꼼수도

1964년 김대중 토론, 국내 첫 사례
테러방지법 토론, 세계 최장 기록
정치적 결기보다 ‘홍보 도구’ 전락
고발 주체 국회의장 ‘증감법’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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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권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2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진행하는 가운데 회의장이 텅 비어 있다.  안주영 전문기자
박충권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2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진행하는 가운데 회의장이 텅 비어 있다.
안주영 전문기자


“4개의 법을 24시간씩 (토론)하다 보니까 (국회의원들이) 밖에도 계시고 조별로 참석하고 있어 (본회의장에는) 많은 의원들이 없는 것입니다.”

여야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대결 닷새째인 29일 오후. 우원식 국회의장은 박성훈 국민의힘 의원의 토론을 잠시 멈춘 뒤 방청석에 앉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기대와 달리 의장과 토론자 등 극소수 의원만 띄엄띄엄 앉아 있는 텅 빈 회의장에 실망했을 어린 학생들에게 의장이 직접 변명 아닌 변명을 한 셈이다. 여야의 치열한 논리 대결이 아니라 형식적 시간 끌기가 돼 버린 국회 필리버스터의 현주소를 보여 주는 단적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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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4일 방송법 개정안을 놓고 필리버스터가 진행됐을 때도 일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서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지난해 7월 채해병 특검법 반대 필리버스터 때는 국민의힘 일부 의원이 눈을 감은 채 잠든 모습을 보였다가 나중에 사과하기도 했다. 여야 충돌로 본회의 강행과 필리버스터 대응이 ‘뉴노멀’이 됐지만 이 또한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걸 보여 준 것이다.

특히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주목받은 것은 ‘극한 직업’으로 떠오른 국회 의장단이다. 앞서 국민의힘 소속 주호영 부의장은 여당 주도 입법 강행을 이유로 필리버스터 사회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국회 의사과는 우원식 국회의장과 민주당 소속 이학영 부의장 간 ‘맞교대’ 방식으로 사회 일정을 편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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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혜(아래) 국민의힘 의원이 29일 국회 증언·감정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하는 가운데 우원식 국회의장이 졸고 있다.  안주영 전문기자
김은혜(아래) 국민의힘 의원이 29일 국회 증언·감정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하는 가운데 우원식 국회의장이 졸고 있다.
안주영 전문기자


이날 국회 증언·감정법 개정안 관련 여당 토론자로 나선 박홍배 민주당 의원은 우 의장과 이 부의장이 4박 5일 내내 교대로 사회를 보자 “근로기준법상 과로사의 기준에 들어가는 초장시간 노동”이라고 말했다. 우 의장은 이날 김은혜 국민의힘 의원의 반대 토론 때 졸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민주당은 이날 저녁 필리버스터 종결 투표 후 위증 고발 주체를 법제사법위원장이 아닌 국회의장으로 재수정한 국회 증언·감정법 개정안을 표결 처리했다. 한편 이날 의사일정 변경을 통해 상정된 온실가스 배출거래법 개정안은 야당의 필리버스터 없이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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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25일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위해 양손에 자료를 잔뜩 든 채 발언대로 향하고 있다. 박 의원은 17시간 12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진행해 자신이 세운 기존 최장 기록을 경신했다.  연합뉴스
박수민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25일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위해 양손에 자료를 잔뜩 든 채 발언대로 향하고 있다. 박 의원은 17시간 12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진행해 자신이 세운 기존 최장 기록을 경신했다.
연합뉴스


필리버스터가 연일 이어지며 최장 기록은 또 경신됐다. 첫날 첫 주자로 나선 박수민 국민의힘 의원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내용의 필리버스터를 17시간 12분 동안 하면서 자신이 세운 기존 최장 기록(15시간 50분)을 깼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 개정 이후 2016년 첫 필리버스터에 나선 의원들의 말 못 할 고민 중 하나는 ‘생리적 현상’ 문제였다. 연단에 서서 한창 토론하던 중에 화장실로 달려가기는 민망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에 당시 몇몇 의원들은 성인용 기저귀로 무장하고 토론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당시 안민석 민주당 의원이 화장실을 다녀온 선례를 남겼고, 이후엔 화장실을 다녀오는 건 관례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번 4박 5일 필리버스터 과정에서도 역대 최장 기록을 경신한 박 의원이 간간이 화장실에 다녀왔다.

화장실에 간 김에 간식을 먹거나 휴식을 취하는 ‘꼼수’도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의원실 한 관계자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보니 중간에 휴게실을 들러서 초콜릿이나 바나나를 먹고 오는 의원들도 있다”고 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64년 4월 김준연 자유민주당 의원의 체포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헌정 사상 최초로 필리버스터를 진행한 바 있다. 2016년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 의원들이 192시간 27분에 걸쳐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 나서 세계 최장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민주당 이종걸 전 의원, 정청래 대표 등이 장시간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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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8일 국회법 개정안 필리버스터를 종료하기 위한 무기명 투표에 참여한 후 기표소에서 나오는 모습. 연합뉴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8일 국회법 개정안 필리버스터를 종료하기 위한 무기명 투표에 참여한 후 기표소에서 나오는 모습.
연합뉴스


그러나 정치적 결기의 상징이었던 필리버스터가 최근 들어 너무 잦아지면서 의원 개개인의 홍보 영상 제작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4박 5일간 ‘법안 상정→필리버스터→24시간 후 강제 종료→법안 처리’가 반복되자 필리버스터 무용론까지 제기됐다. 다음달 2일 비쟁점 법안 처리를 위한 본회의가 열리면 추석 연휴 내내 ‘필리버스터 정국’이 이어질 수도 있다.

이에 필리버스터 제도를 도입 취지에 맞게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신동욱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필리버스터 강제 종료 요건을 재적 의원 5분의3 이상 찬성에서 3분의2 이상 찬성으로 강화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강윤혁·김가현 기자
2025-09-3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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