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세계에 던진 화두, 제국은 어떻게 망하는가 [세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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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국진 기자
강국진 기자
수정 2025-10-05 09:00
입력 2025-10-05 09:00

피터 헤더·존 래플리 지음, 이성민 옮김, 2024, <제국은 왜 무너지는가>,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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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청년, 미국에서 길을 잃다미국에 처음 갔던 날 나는 길을 잃었다. 해가 지면서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돌아가야 할 집을 찾지 못해 한여름에 식은땀을 흘리며 두리번거렸다. 내 옆에는 사돈댁 여자아이가 한 손으론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맛있게, 그리고 세상 태평하게. 세살짜리 꼬마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시작은 순조로웠다. 미국에 사는 누나 덕분에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됐다. 공항 입국장에는 누나네 막내 시누이가 마중나왔다. 누나는 시카고에서 시부모와 미혼인 시누이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내가 1년간 지낼 곳이기도 했다. 짐을 내려놓고 인사도 하고 하는 와중에 근처에 사는 누나네 큰시누이가 나에게 ‘간단한’ 부탁을 했다. 집 근처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둘째딸에게 사달라며 돈을 쥐여주었다.

길은 얘가 다 아니까 그냥 따라갔다가 오기만 하면 돼.

조그맣고 예쁘장한 그 세살짜리 꼬마는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가게에 도착했고 아이스크림을 샀다. 하나도 어려울 게 없는 심부름이었다. 이 꼬마가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정신이 팔려서 집을 지나쳐 한참을 걸어가기 전까지는. 아이가 잡아끄는대로 몇 분 걷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 길이 맞느냐고 물었더니 꼬마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으면서.

몰라.

그때부터 패닉이 시작됐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집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높은 건물처럼 기준이 될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다가가서 외워둔 주소를 불러주며 길을 물었다. 그가 친절하게 그리고 길게 설명을 해줬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번째 지나가는 사람은 영어를 나보다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국 사람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 아임쏘리 아이돈노우 잉글리시.

세번째는 어떤 소년이었는데 다소 짧게 길을 가르쳐줬다. 물론 말을 알아들은 건 아니었고 그 소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갔다. 짧은 국제미아 신세는 그렇게 끝이났다. 며칠 지나 알게 됐다. 내가 길을 헤맨 곳은 목적지에서 수십미터도 안되는 곳이었다.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뒤 1년을 보낸 미국 생활은 꽤 괜찮았다. 영어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게 특히 즐거웠다. 이란 출신인 동시에 유대인인 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도서관 사서, 옛 소련 시절 군대에서 태권도를 배웠다는 러시아 아저씨, 불가리아에서 교사를 했던 아줌마, 아르메니아 할아버지, 나와 생년월일이 똑같아서 서로 놀랐던 리투아니아 청년, 에스토니아에서 온 아가씨, 일본 유학생.

그들은 모두 일자리와 성공, 기회를 찾아 미국에 이민왔다. 미국을 새 고향으로 삼았다. 미국으로 이민 온 새 미국인들을 만나고, 조상이 미국으로 건너 온 미국인들을 만나며 세계를 보는 눈이 확 넓어졌다. 미국을 보는 시각 역시 예전같을 수 없었다.

21세기, 스스로 길을 잃어버린 미국의 시대언젠가 동생과 어학연수 당시 경험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둘 다 1년쯤 누나 집에서 살며 공부를 했다. 나는 상쾌했던 시카고 날씨와 공부생각이 절로 나게 만드는 대학 도서관, 친절했던 사람들을 얘기하며 추억에 젖었다. 동생은 좀 달랐다. 내가 귀국하고 1년 뒤 미국에 갔던 아우는 어학연수 중간에 9·11을 겪었다. 아우는 당시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테러 때문에?

아니 9·11 이후 미국 사람들 눈빛이 이상해졌어.

그렇게 내가 알던 미국은 더 이상 없는 듯 했다. 9·11과 아무 상관없는 이라크까지 침략해서 점령하며 힘을 과시하던 미국은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트럼프는 과격한 부자감세를 계속하고 있고 그 비용은 관세수입으로 충당하려 한다. 결국 외국 정부와 기업들 팔을 비틀어서 미국 국내 부자들 배를 불리는데, 그 와중에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다. 한미동맹은 이제 돈을 뜯어내기 위한 쇠고랑이 돼 버렸다.

생각해보면 9.11 이후 3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300년 뒤 역사가들은 미국이 21세기에 진입할 때 전성기를 누리다가 한 세대 만에 결정적인 붕괴로 무너져내렸다고 적을지도 모르겠다.

<제국은 왜 무너지는가>는 미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인지, 그리고 미국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할 때 읽으면 딱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제국 후기와 중세 초기 유럽사를 전공한 역사학자 피터 헤더와 정치경제학자 존 래플리가 함께 쓴 책이다. 둘 다 영국인이다. 제국의 흥망성쇠, 그리고 제국주의가 세계 곳곳에 싸질러놓은 똥을 얘기하는 데 이보다 더 적합할 순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게 2023년(국내 번역본은 2024년)이었다. 저자들은 설마 트럼프가 2021년 물러난 뒤 2024년 11월에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트럼프가 줄기차게 외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이른바 ‘마가’가 완전히 잘못된 진단과 엉터리 처방으로 미국을 망치는지 예언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양에서 고대 로마제국은 교훈과 상상력의 원천이다. 로마가 어떻게 시작했으며 어떻게 번성할 수 있었는지, 왜 멸망했으며 어떻게 쇠락했는지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거론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저작이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 제국 쇠망사>다. 18세기 후반에 나온 이 책은 로마가 황금기였던 2세기 이후 느리고 긴 쇠퇴를 거쳐 5세기에 몰락했다고 주장했다. 문화 측면에선 기독교가 번성하면서 군사력이 약해졌고, 야만족의 침략과 내부 분열로 경제적 활력과 정치적 통합을 잃었다고 봤다.

<제국은 왜 무너지는가>는 기번의 연구와 수백년간 계속된 그의 학문적 권위를 박살내 버린다. “기번은 틀렸다… (로마) 제국은 붕괴 바로 직전까지도 번영의 정점에 있었다(41~42쪽).” 로마는 제국이 정치적으로 붕괴하기 직전인 4세기에 정점에 올랐다. 기독교가 로마의 문화적 통합을 해쳤다는 주장도 과장됐다.

저자들이 보기에 로마와 미국(그리고 서구)이라는 두 제국은 제국의 오래된 생명주기를 따라간다. 1999년 80%에 이르던 서구의 세계 총생산량(GGP) 비중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0년 만에 60%까지 줄었다. 이제 중국은 명실상부한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자리를 잡으며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야만족(혹은 중국)의 침공 때문이 아니다. 모두 제국 스스로 만들어낸 구조가 작동하다가 그 결과로 주변부에서 새로운 세력이 제국의 후계자를 노리기 시작했다(237쪽).

“제국은 경제 발전으로 생명주기를 시작한다. 제국은 지배적 위치에 있는 제국 핵심으로 향하는 새로운 부의 흐름을 생성하려고 나타나지만, 그 과정에서 정복한 지역과 일부 주변부에도 새로운 부를 창출한다… 주변부의 대규모 경제 발전은 그 즉각적인 결과로써 앞서 생애주기를 시작한 제국의 지배권력에 반기를 드는 정치적 과정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오래된 제국 중심지는 어느 정도의 상대적 쇠퇴를 피할 수 없다. 한마디로 이제 단순히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는 없다(22쪽).”

트럼프는 <로마 제국 쇠망사>에 영감을 받은 듯 이민자를 만악의 근원인 양 몰아붙인다. 하지만 저자들이 보기에 이 또한 근거가 없다. 물론 로마제국에게 ‘야만족’의 침략은 강력한 위협이었던 게 사실이지만, 현대 이민은 오히려 미국에 경제적 이익이 된다.

“서구 복지 국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은 외국인의 유입이 아니라 수명을 연장하고 부양 비율을 엄청나게 증가시킨 전후 번영의 결과다. 외국에서 훈련받은 의사와 간호사에 의존한 덕분에 많은 공공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의료진 생산 비용의 상당 부분을 다른 나라로 전가해 서구 납세자의 막대한 돈을 절약했다(167쪽).”

이른바 ‘좋은’ 이민자와 ‘나쁜’ 이민자 사이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저자들은 “이주를 완전히 중단하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경제 쇠퇴의 비결(169쪽)”이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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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 단속 당국이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벌인 불법체류·고용 단속 현장 영상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2025.9.6. ICE 홈페이지 영상 캡쳐 연합뉴스
미국 이민 단속 당국이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벌인 불법체류·고용 단속 현장 영상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2025.9.6. ICE 홈페이지 영상 캡쳐 연합뉴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면 중국을 압박하고 견제해야 할까? 혹은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는 중국과 미국의 군사대결은 불가피한 과정일까? 저자들은 이 또한 조목조목 반박한다. 중국의 부흥은 오랜 역사라는 맥락에서 보면 제 자리를 찾아가는 복귀에 가깝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맡았던 세계 질서를 지키는 경찰이라는 특별한 세계적 역할은 아시아의 짧고 예외적인 권력 공백을 반영한 것(202쪽)”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갑자기 꼬꾸라질 일도 없거니와 무리한 압박은 역효과만 초래하고 “재앙(204쪽)”으로 이어질 뿐이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협력, 그리고 냉철한 현실 인정이다. “서구 국가들이 세계 주변부에서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고 싶다면, 개발도상국을 희생해 서구의 위대함을 보존하려는 암묵적인 경쟁에서 벗어나 그들의 전반적인 번영과 사회 및 정부 구조 두 가지 모두를 강화하도록 지원하는 방향으로(199쪽)” 노선을 전환하는 게 서로에게 훨씬 더 이롭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은 19세기와 20세기 방식으로 다시 위대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주변부 국가를 착취하는 국내 압력을 완화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런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착취할 수 있는 것은 동료 시민뿐(240쪽)”이다.

트럼프가 선택한 건 동료 시민들을 착취하는 건 계속하면서 그들의 반발을 이민자와 외국에 떠넘기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이 발전했던 원동력이었던 자유로운 상상력, 혁신을 장려하는 도전정신, 이민자들에게 관대한 문화를 말려 죽이는 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시진핑의 최대 후원자가 트럼프라는 말이 빈말로 느껴지지 않는 202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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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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